이사한 후 일주일에 서너 번씩 이케아를 갔다. 서울시 광진구에서 광명시 혹은 고양시를 오갔다. 그곳은 한번 갈 때마다 대중교통으로 서너 번의 환승과 왕복 4~5시간을 할애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팽창된 파란 이케아 비닐 백을 터지지 않게 투명 테이프로 봉합한 후 그것을 양쪽 어깨에 이고 집에 돌아오노라면 난 항상 녹초가 되어있었다. 어깨엔 항상 붉은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는 이 주간 지속되었는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난 어깨에 새로운 상처들을 덧칠했다. 이 지겨운 이케아, 언제까지 가야 할까....
2019년 7월 2일부터 한국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가 대한민국의 수출 통제 조치를 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에서 ‘노재팬’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사 후 보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집의 생필품과 가전제품 등 여러 브랜드를 찾아보아도 성에 차는 것이 없었다. 원하는 디자인은 하얗고 군더더기 없는 것. 그러던 중 일본의 무인양품,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의 가전제품에 눈이 멈췄다. 바로 내가 찾는 것들이었다. 대체 가능 품을 못 찾은 나는 하나둘씩 몰래몰래 제품들을 들어 나르기 시작했다. 물건을 살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죄책감이 쌓였지만 지금 나에게 이것들은 너무 중요한 것이기에 난 그렇게 무인양품을 집 드나들듯 오갔다.
집에 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어느 정도 들였는데도 여전히 집이 허전하게 느껴진다. 금색 기린 조형물, 동그란 나무 모빌, 여러 재질과 크기의 화병 등.. 사용하지 않는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을 집에 들이니 집이 집 같아졌다. 실용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들, 있으나 없으나 사는 데 불편을 주지 않는 것들, 이것이 무쓸모의 쓸모인가. 그리고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는 프라모델, 피규어 역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집을 집 같이 만들어주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사물이 이것이지 않을까.
(d) 하얀 집착
문, 창틀, 벽지 모두 하얀색이다. 그러다 보니 하얀색의 물건들이 눈에 거슬리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다. 집에서 검은색이라곤 내가 두르는 것들뿐, 옷가지나 가방, 지갑 같은 소품들뿐이다. 그렇기에 집에 두는 것들은 거슬리지 않게 하얀색 페인트로 칠한다. 화려한 색의 피규어도, 수납장도, 전구의 검정 이음새도.
(e) 빛의 표정
밤이 되면 노란 전구색 등을 켠다. 전구는 와트와 칼빈에 따라 색과 밝기가 정해진다. 적당한 조도에 대한 집착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비싼 스마트 전구 사는 건 부담스럽기에 내가 원하는 빛을 구하고자 여러 시도를 한다. 다양한 수치의 전구를 사서 설치해 보지만 결국 가장 마음에 드는 빛은 4와트, 2400칼빈 오스람 전구에 A4지 한두 장 구겨 덮어 만든 어둑해진 조도이다.
(f) 환영
향수도 잘 안 쓰는 나인데 어느 샌가부터 집에 향기가 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올 때 향기가 나를 반겨주면 바깥의 피로가 잠시 차단 되는것 같았다 . 처음은 빨래를 말렸을 때 나는 섬유 유연제 향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그래서 디퓨져에 눈을 돌렸고 디퓨져를 사고자 드러그 스토어나 백화점들을 들렀다. 몸의 세포가 반응하는 향을 찾았지만 500ml가 십만 원대였다. 그래서 향을 조향하게 된다. 방산시장에 여러 차례 가서 유칼립튜스, 샌달우드, 시더우드, 베르가못, 로즈마리, 시트러스 버베나 등의 향을 사 디퓨져를 만든다. 사다보니 재료비만 십만원이 넘었다. 3,000ml 정도를 만들어 방마다 나누어 놓았지만 향이 잘 안 났다. 그래서 향초들을 구입한다. 하지만 향초는 태울 때만 잠시 향이 났다. 포기하고 지내던 중 인센스를 알게 되었고 인센스 향의 지속력에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다. 인센스 역시 내가 좋아하는 향을 위해 수십 개를 사서 시향 한다.
(g) 흠집
집에서 지내면서 벽에 여러 흠집을 내게 되었다. 못질을 하거나, 글루건으로 고리를 붙이거나, 테이프로 가볍게 붙이거나, 꼭꼬핀으로 여러 구멍을 내게 되는데 그로 인해 벽과 벽지에 깊거나 미세한 흠집들이 남게 되었다. 그 흠집들은 내가 이 공간에서 지낸 증거이기도 하다. 그 흠집을 가린 사물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h) 완벽은 없다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는 것이 있다. 머릿속에는 있고 찾아지지는 않고.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팔아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가격과 100프로 만족할 만한 외형의 사물을 어렵게 찾아 사용해 보지만, 막상 제품 본연의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완벽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후 훌훌 털고 다시 차선책을 찾게 된다.
(i) 대접
사물을 사용할 때 그 사물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이 있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물을 사용할 때 배려심이 느껴지는 것들이다. 그로 하여금 사용하면서 대접받는 느낌까지 든다. 숟가락, 젓가락 받침대라든지, 컵의 코스터, 디퓨져 아래 받침이라든지. 주로 사물 아래에서 사물의 무게를 지탱해 주는 것들이다.
(j) 축하
새로운 시작이 가족, 지인들로 하여금 축하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집에 좋은 기억을 심기 위해 집들이를 연다. 지인들이 선물한 사물 중 일부는 내가 선택한 것들도 있다. 그 사물을 보면 지인의 얼굴과 지인을 만났던 과거의 경험들이 떠오른다.
(k) 동경
내가 구입한 사물 중에는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 받은 것들이 꽤 있다. 상을 받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되어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상까지 받은 것들이었다. 나도 언젠간 그럴 수 있길 소망하며 동경해본다.
(l) 규칙적 관심
규칙적인 관심이 필요한 사물들이 있다. 그 관심들은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일주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는 식물들이 그것이다. 내가 하루를 보내기 위해 밥을 먹듯, 식물들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규칙적인 관심을 필요로 한다.
(m) 증거
사물들을 구입한 영수증들... 그간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영수증의 빛바랜 잉크는 주로 간 브랜드부터 구입한 사물의 금액들과 종류들, 움직였던 흔적의 증거이다.
(n) 어머니의 사랑
이사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어머니께서 주시는 사물을 거절하는 일이었다. 단지 사물을 거절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만 같아 매 순간 쉽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주려고 하셨던 많은 생활용품. 튼튼한 스테인리스 밥그릇, 붉은색과 검은색 조합의 물걸레 청소기, 보라색 프라이팬, 밥맛이 좋은 검은색 12인용 쿠쿠 압력밥솥, 쨍한 원색의 반찬통, 기념일이 프린트된 수건, 예쁘게 수 놓인 꽃무늬 배게 등.... 받아도 안 받아도 신경이 쓰이는 상황들이었다.
(o) 검열
전에 살던 집에서 가져온 사물들이 더러 있다. 새로운 곳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것 같은 사물들이다. 검열에 통과한 사물들은 생각보다 적다. 스무개는 되려나...
(p) 진짜처럼
비용 문제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 들이 있다. 자연 본연의 소재를 좋아하지만 자연 소재는 가격이 꽤 나간다. 그래서 무늬로 나마 분위기를 내기 위해 구입한다. 주로 합판에 나뭇결 무늬를 입힌 가구들이다. 살아가면서 천연 원목의 가구로 대체할 날이 언젠간 오겠지.
(q) N차 신상
여러 차례(N차) 거래되더라도 신상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진다는 N차 신상. 내가 사물을 들릴 때 꽤나 많이 이용했던 중고거래가 2021년 트렌드다. 내 기준으로 비싸다고 생각되는 가전제품, 생활용품은 대부분 중고마켓에서 거래했다. 물론 사용일이 적고 원하는 가격대로 나온 물건을 사기 위해선 시간 투자가 필수였다. 대체품이 없는 제품은 가격 때문에 일 년 넘게 기다리기도 했다.
(r)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면이나 색상이나 재질 면이나 집에 있는 사물들과 잘 어울리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공간에 두니 뭔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물들이 있다. 그 사물을 통해 주위 사물들과 미세하게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사물들을 되 팔게 된다. 또한 생각보다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거나, 쓸모가 없어져서 되팔은 것들도 있다. 하나만 보면 알 수 없으나 주위에 있는 것들과 함께 두면 확실히 보여지는 것이 있다.
(s) 코로나19덕
2020년 2월 12일 세계보건기구를 통해 코로나(COVID-19)가 명명되었다. 이사 후 반년이 지난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팬데믹 시대가 되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집에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일, 공부, 운동, 식사 등... 또한 약간의 변화들로 집콕 생활에 지루함을 없애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생겨났다.
(t) 쉼터꿈터
작은방이 있다. 바깥에서 힘들게 일하고 들어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되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길어지게 되면서 집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책상을 두고 일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일에 능률이 안 오른다고 생각되어 이후에도 여러 번 책상의 자리를 바꿨다.
(u) 내 손
구하기 어렵거나, 구할 수 없거나, 저렴하게 사용하기 위해 직접 만든 사물이 있다. 그 사물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해 보이거나, 어디서도 볼 수 없기에 특별해 보이거나.
(v) 불안정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음악을 듣는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예전에는 듣지 않던 음악을 듣게 되었다. 이 집에 오기 전까진 일렉트로닉, 모던록, 인디 장르를 주로 들었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 클래식과 재즈를 듣게 되었다. 이 음악들은 불안정한 마음에 안정과 위안을 준다. 마음을 주물거리며 집중하게 만든다. 그것은 공간의 공기를 다르게 바꿔주며, 빗소리를 들을 때처럼 몸을 흐물거리게 한다.